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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작성일자
  2016-09-01
  제 목
  대정 학술상 (2016)
  1. 2016년 제4회 대정학술상 수상자, 수상논문

. 수상자: 권오민(경상대학교 교수)
. 수상논문: 「원효교학과 아비달마 –화쟁론을 중심으로-」, 『동아시아불교문화』 21호(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5)



2. 제4회 대정학술상 수상소감

화쟁과 회통의 불교학을 고대한다

권오민


대개의 학술상은 공모와 응모, 그리고 심사라는 절차를 거쳐 수상자를 선정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죄송스럽게도 대정 장학재단이라는 단체도, 대정학술상의 존재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무더위가 한창이던 8월 초 어느 날 심사위원장이신 혜원 스님으로부터 이 상의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공모와 응모의 절차 없이 작년에 발표된 논문 중에서 선정하였다는 것입니다. 좀 당황스럽기도 하였습니다. 문득 신진학자가 받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치기도 하였습니다. 지나간 변변치 못한 업적보다는 미래의 가능성이 더 소중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아무튼 뜻밖이었지만, 저의 논문을 대정학술상 수상논문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이 상을 제정하고 운영하는 재단 관계자와 이사장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학자로서 자신의 학문적 업적을 인정받는 것보다 뜻깊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수상논문이 「원효교학과 아비달마: 화쟁론을 중심으로」라는 것도 뜻밖이었습니다. 이는 저의 학업과 관련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주된 관심은 아니었고, 논문 또한 자발적인 문제의식에 의해 저술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는 불교학연구회가 기획한 2014년 추계 불교학술대회 <동아시아 속의 원효>의 한 파트(‘원효와 아비달마’)로 청탁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거절하였습니다. 특정주제의 불교학술대회에서 아비달마 분야는 거의 대개는 ‘구색용’일뿐더러 원효는 불교학의 거의 모든 관점에서 조망이 가능하고, 해서 화엄이나 정토, 계율 나아가 인명 등의 敎家로 불릴 수 있을지라도 毘曇敎家(아비달마학자)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절하기 어려운 후배 교수의 거듭된 강권에 구색용은 되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청탁을 수락하였습니다.

논문의 기조에 대해 짧게라도 말씀드릴까 합니다. 앞서 이 논문이 저의 주된 관심은 아니라고 하였는데, 불교학에 눈뜨고부터 주된 관심은 經量部(Sautrāntika)라는 부파였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경량부는 20여 부파 중 그냥 일개 부파는 아니고, 언제부터인가 불교 4대 학파의 하나로 꼽혔으며, 오늘날에도 티베트에서는 여전히 유식·중관과 함께 둡타(宗義)의 한 분야로 학습됩니다. 그렇지만 이 학파의 소의 문헌이 남아있지 않아 중요성만 강조되었을 뿐 세부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연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관심을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불교학의 많은 문제가 이 학파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었고, 유부와 유가행파 문헌에서 이 학파의 자취를 다량으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경량부는 ‘經(sūtra)을 지식의 근거(量)로 삼는다’는 의미의 불교학파입니다. “經을 지식의 근거로 삼지 않는 불교도 있던가?”
“예, 있습니다. 불교 4대학파의 첫째인 毘婆沙師(Vaibhāṣīka), 說一切有部입니다.” 이들은 아비달마(abhidharma)를 지식의 근거로 삼습니다. 이들에게 있어 아비달마는 단순한 論이 아니라 經說의 취지(究竟義, 了義)를 밝힌 진정한 佛說입니다. 불설은 다만 불타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正理(논리) 法性(진실)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불설론을 정립한 이들이 아비달마논사(Ābhidharmika)였고, 이를 천명한 것이 바로 아비달마라는 것입니다. “말(語)에 의지하지 말고 뜻(義)에 의지하고, 불완전한 뜻(不了義)에 의지하지 말고 완전한 뜻(了義)에 의지하라.”는 등의 四依 또한 아비달마 불설론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경량부는 이 같은 아비달마 불설론의 가장 강력한 반론자였습니다.: “아비달마는 불설이 아니다. 불타에 의해 분명하고도 결정적으로 설해진 것(顯了定說), 주제의 제시와 해석(標釋)을 갖추어 달리 이해할 여지가 없는 것만이 불설이다.” 그래서 ‘경량부’였습니다.
이에 대해 衆賢(Saṃghabhadra)이라는 유부논사는 누누이 강변합니다.: “경에서 설한 대로의 뜻(如說義, yathārutārtha)이 경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경설에 담겨있는 별도의 뜻(別意趣, 密意, abhiprāya)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毘婆沙師는 경설의 문자에 집착하는 이들을 ‘着文沙門’이라 비난하였습니다.
“사람(권위)에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는 불타 遺敎는 당신의 멸도 후의 불교학의 방향을 지시한 것이었고, 이것이 우리에게 전해진 불교학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법성 중심의 아비달마 불설론은 이후 대승경전 찬술의 초석이 되었고, 대승 불설론의 핵심논거가 되었습니다.: “대승경이 불설인 까닭은 정리 법성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무착은 『반야경』과의 회통을 꾀하며 이같이 말했습니다.: “대승은 매우 심오하여 경에서 말한 대로의 뜻(如文義)이 아니기 때문에 이에 따라 불설이 아니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원효의 화쟁 논리 또한 여기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에게 대승경이 불설인 까닭은 그것이 正理(즉 법성)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으로, 당연히 경의 뜻 또한 경에서 설한 대로가 아니기 때문에, 설하고 있는 내용만을 취(이해)하여 서로를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일승방편 삼승진실’의 『해심밀경』과 ‘삼승방편 일승진실’의 『법화경』은 문구대로라면 당연히 서로를 배척합니다. 제법실유의 아함과 제법개공의 반야 역시 그러합니다. “경에서 말한 대로의 뜻만 취하면(如言取義) 서로를 인정할 수 없지만, 경설의 취지를 밝혀 말한다면, 인정하지 못할 것이 없다.” 이 말은 원효의 저술 상에서 수 없이 되풀이 되는 화쟁의 주요 형식입니다. “물과 젖이 서로를 배척하지 않듯이, 사상을 달리하는 온갖 經說 또한 해탈로의 나름의 논리를 갖기 때문에 서로를 배척해서는 안 된다.” 의정스님이 『남해기귀전』에서 전한 당시 불교도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화쟁은 원효의 독창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불교의 근본정신이었고, 불교다양성의 원천이었습니다. 불교의 모든 경론은 이미 화쟁의 산물이었습니다. 사상과 성격을 달리하는 성전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뭇 종교에 비교하면 금방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위대함입니다.

오늘 우리의 불교/불교학이, 물론 저의 관견이기는 하지만, 점점 교조화 되고 배타적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친설’이니 ‘원음(原音)’이라는, 감상에 기댄 정체불명의 말도 횡행합니다. 원효 역시 교조화 되고 있습니다. 좋고 좋은 것은 다 원효의 것으로 돌려집니다. “원효만으로 원효를 읽는 것은 원효를 욕보이는 일이다.” 앞서 구색용은 되지 않겠다는 저의 다짐은 이 같은 뜻을 전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원효가 불교사상가라면 당연히 불교사상사의 맥락에서 원효를 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논문으로 상을 주신 것은 저의 이런 취지에 심사위원의 공감이 있었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대정학술상의 수상자로서 이 상의 취지를 마음에 새기고 있을 것입니다.


3. 권오민 교수 주요논저

. 저서: 『유부 아비달마와 경량부철학의 연구』, 『아비달마불교』, 『인도철학과 불교』, 『불교학과 불교』, 『상좌 슈리라타와 경량부』 등
. 역서: 『아비담팔건도론』, 『아비달마발지론』, 『입아비달마론』, 『아비달마장현종론』(전2권), 『금칠십론』, 『승종십구의론』, 『아비달마구사론』 등
. 논문: 「上座 슈리라타의 ‘一心’」, 「上座 슈리라타의 一心과 알라야식」, 「상좌 슈리라타와 무착과 중현, 그리고 세친」, 「先代軌範師의 ‘色心互熏說’ 散考」, 「알라야식의 존재증명과 경량부(1)-『유가사지론』의 경우」, 「알라야식의 존재증명과 경량부(2)-『섭대승론』의 경우」, 「불교지성의 전통과 역사」 등 80여 편.